tvN의 <유 퀴즈 온 더 블록>(유퀴즈) 63화 ‘정의란 무엇인가’ 편에 출연한 천종호 판사님을 보고 반가웠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유재석씨가 소년 재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에 대해 질문하고 판사님이 답변한 것입니다. 판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법정에 선 소녀는 소년원에 장기(2년 이내) 송치하는 10호 처분 대상이었습니다. 문제는 소녀가 임신한 상태였고 또한 문제는 임신한 소녀가 지내기에 소년원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소녀는 성매매 중에 잘못된 임신을 했으니 낙태할 수 있도록 선처를 베풀어달라고 요청했는데 판사님이 사실 여부를 알아보니 남자 친구와의 관계에서 임신한 것으로 거짓말이었습니다. (소년범 중엔 무거운 처분을 피하려고 일부러 임신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고 합니다.)
소녀에게 선처를 베풀면 불법 낙태를 묵인하게 되는 상황, 판사님은 한 달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고심한 끝에 법관의 양심에 따라 10호 처분을 내렸습니다. 하늘이 주신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죽이는 불법 낙태를 방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10호 처분을 받은 소녀는 여자소년원에서 지내야 했고 소녀가 임신 9개월이던 무렵, 소년원에서 연락이 왔는데 소녀가 출산할 수 있도록 처분 변경(석방)을 요청, 처분 변경을 위한 재판에서 소녀에게 준비한 배냇저고리를 전달, 법정에 있던 사람들은 가슴 아프고 따뜻한 장면에 눈물 흘렸습니다.
많은 시청자와 네티즌들이 판사님 이야기에 감명받았습니다. ‘피오나징’은 유튜브 영상에 남긴 댓글에서 “아침부터 눈물 쏟네요. 한 달을 잠도 못 주무실 정도로 판결 내고 얼마나 힘드셨을지ㅜㅜ”라고 했고 천종호 판사님이 롤 모델이라고 밝힌‘뚜비닝닝’은 “중학교 3학년 때 유튜브로 재판하시는 거 접하면서 법 관련 꿈을 키웠다”면서 “고3 때 현실에 부딪쳐 다른 과에 재학 중이지만 제 학창시절은 천종호 판사님께서 만들어진 추억과 경험들이 가득하답니다. 판사님은 제가 정말 존경하는 분”이라고 밝혔습니다.
판사님의 길을 따라
걷는데 실패 연속입니다!
판사님을 처음 뵌 게 2014년이니 그새 7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시 저는 판사님이 만든 ‘사법형 그룹홈’(소년범의 재비행 방지를 위해 만든 공동생활가정) 소식을 듣고 서울가정법원이 위탁한 소년들을 보호하는 사법형 그룹홈과 어게인이란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수도권 최초의 사법형 그룹홈이었지만 1년도 못 돼 문 닫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으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보호하던 아이들이 다 도망가면서 텅 빈 집이 됐습니다.
부모와 사회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고 그 상처를 아물게 해서 삶의 주인공으로 거듭나게 하는 일을 감당하겠다고 큰소리치며 길을 나섰는데 7년째 실패 연속의 쓰라린 길을 헤매고 있습니다. 손을 잡으면 뿌리치고, 밥을 주어도 감사한 줄 모르고, 희망을 주면 절망을 토해내는 아이들, 온갖 거짓말과 반사회적 행동으로 뒤통수를 치는 아이들에게 당한 저는 이 바닥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사랑 없는 내가 무슨 사랑을 한다고, 잘못 선택한 길에서 너무 오래 헤매는 것은 아닌가?
유퀴즈 방송 이후, 천종호 부장판사님께 안부 문자를 드렸더니 곧바로 전화를 주셨습니다. 판사님의 전화를 받고 설움에 북받친 것처럼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사랑은커녕 밉고 화날 때가 많다고, 실패 연속의 길을 걸었다고, 쉬지도 못하고 달려왔다고, 심신이 지쳤다고 했더니 판사님은 흉보지 아니하고 그 마음을 안다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공감하며 위로해주었습니다. 거리가 가까웠으면 긴 밤 지새우며, 아픔을 토로하며 판사님의 위로와 기도를 받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시를 썼습니다.
사랑을 그렇게 쉽사리
말하고 호언장담했지만
막상 사랑은 괴로웠습니다.
사랑의 길은 달콤한 길이 아니라
찔리고 또 찔리는 가시밭길이므로
누구도 쉽사리 가지 않으려는 길에서
상한 이웃을 사랑하다 상하는 길에서
만신창이 가슴을 위로해주는 동역자여
그대의 위로가 나의 눈물이 되었습니다.
찔리고도 덜 아픈 것처럼 보듬어 주시는
그대 사랑에 힘입어 가야 할 길 다시 갑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
천종호 판사님의 호소
"나의 아버지는 가난한 목수였습니다. 아버지의 일이 끊기면 끼니도 때우기 힘들었습니다. 목수의 아들이 판사가 되고 싶었던 것은 가난의 억울함을 벗고 싶어서였습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수치심을 당하고, 억울함을 당해도 호소할 곳조차 찾지 못하는 이웃 속에서 자랐습니다. 미련할 정도로 악착같이 고시 공부를 한 것은 아버지와 같은 약자를 돕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판사가 되자마자 다 잊어버렸습니다. 돈 잘 버는 변호사가 되기 위한 인맥을 쌓으려고 밤이면 술자리를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다 소년 재판을 맡으면서 고시생 시절의 다짐이 생각났습니다. 소년 전담 판사가 된 것을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천종호 판사님!
가난한 부모 형제를 돕기 위해 돈 많이 버는 변호사가 되려고 준비하다가 하늘의 뜻으로 소년 판사가 된 판사님, 법관의 권위에 갇힌 판사가 아니라 우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판사님, 사회가 비행 청소년에게 비난의 돌팔매질을 하면 “너희들의 잘못만은 아니야. 우리 어른의 잘못이야. 아이들아, 미안하다”고 사과하신 판사님은 비행 청소년의 사회 구조적 문제를 이렇게 진단했습니다. 얼마나 정확한 진단인지 사회를 고치는 의사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소년범들은 아픕니다. 이 아이들은 아파도 아프다고 소리 지르지도 못합니다. 비명도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 지르고, 도움도 손 내밀어줄 사람이 있어야 청합니다. 재비행을 막으려면 따뜻한 가정이 필요한데 부모이혼, 사망, 행방불명, 방치 등의 이유로 버려진 아이들은 오갈 곳이 없습니다. 이 아이들은 이런 환경을 선택한 적도, 원한 적도 없습니다. 국가와 사회의 존재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국가는 이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고, 사회는 이 아이들을 돌봐야 할 공동체적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도 사회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이 소년범들의 비행 구조화의 원인입니다.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는 사회다 보니 경미한 비행이 재비행이 되고, 소년범이 되어 자포자기하고, 범죄의 학습화와 고착화를 거치면서 성인범이 됩니다. 구조적인 악순환입니다. 문제아로 태어난 아이는 한 명도 없습니다. 아이들보다는 낙인찍고, 외면하고, 격리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덮으려는 사회가 더 큰 문제입니다."
판사님은 그러면서 소년범죄를 줄이는 최고의 방법은 처벌과 격리가 아니라 용서와 관용이라면서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자연의 숲에는 간벌(間伐)이 이루어집니다. 비싼 재목을 만들기 위해 방해되는 나무들은 솎아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숲은 간벌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래선 절대 안 됩니다. 강자를 위해 약자를 간벌하면 우리 사회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곳이 인간의 숲입니다. 구조화되는 소년범죄를 줄이는 최고의 방법은 처벌과 격리가 아니라 용서와 관용입니다. 위기 청소년도 대한민국 청소년입니다."
우리들의 만사소년 천종호
판사님의 복귀를 기다리면서
천종호 판사님!
저는 이 길을 걷기엔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이 길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아이들의 반사회적 행동에 화가 나고, 속상하고, 괴롭지만 이 길을 끝끝내 걷겠습니다. 누가 이 아이들 곁에 있겠습니까. 누가 이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겠습니까. 저의 가슴은 상처투성이 아이들을 품기엔 좁은 가슴이지만 그래도 이 아이들을 위해 흘릴 눈물이 남았으니 이 길을 걷겠습니다. 버려지고 상한 아이들에게 희망 한 톨이라도 건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저는 족하겠습니다. 이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청소든 배달이든 뭐든 하는 ‘소년희망배달부’로 낮은 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저야, 본디 밑바닥 출신이니 낮은 곳이 당연하지만 판사님은 부귀영화의 길이 아닌 가시밭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천종호 판사님! 저는 당신의 외로움과 힘겨움을 모르지 않습니다. 높은 곳엔 높은 이들의 시기와 질투가 있고 낮은 곳엔 낮은 이들의 욕심과 모함이 있기 마련이어서 판사님의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닌 상처의 길이라는 것을 저는 모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판사님은 가시밭길을 묵묵이 걷습니다. 모두가 높은 곳을 향하는데 판사님은 좁은 문을 열고 낮은 길을 걷습니다. 그 좁은 문이 생명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마태복음서 7장 13~14절)
판사님은 “퇴임할 때까지 소년 판사, 만사소년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자나 깨나 소년들을 생각하는 '만사소년'(萬事少年)으로 살겠다는 다짐을 새삼 기억하는 것은, 소년 판사로 복귀하시길 소망하는 것은 이 세상 죄인들을 심판할 판사는 많지만 불쌍한 아이들의 생명을 구해줄 판사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판사님의 복귀를 기다리면서 졸시 한 편을 부칩니다.
가난한 아이들,
버려진 아이들,
세상이 미워하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천종호 부장 판사님
뵙는 날까지 평안하고 강건하길 빕니다!
만사소년, 그 사람
- 천종호 판사님께 부치는 시
누구도 편들지 않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소년범의 편이 된 사람
엄벌과 권위의 법정에서 내려와
용서와 관용으로 죄를 씻겨준 사람
낙태로 지워질 미혼모와 생명을
배냇저고리로 살린 생명의 사람
오갈 곳 없어 떠돌다 죄가 된 아이들
바람막이가 되고 집이 되어 준 그 사람
가정에선 학대당하고
학교에서 소외당하고
세상에선 어둠이 된 아이들
그 죄는 아이들의 죄가 아니야
승자독식에 부화뇌동한 우리들의 죄
벼랑에 내몰린 아이들을 떠민 우리들의 죄야
아이들아 미안해 우리가 미안해 우리를 용서해
판사의 권위를 내려놓고 속울음으로 사과한 그 사람
눈이 쌓이면 좋으련만
슬픔만 쌓이는 추운 세상
봄이 오고 꽃이 피면 좋을 텐데
죄와 벌로 꽁꽁 언 겨울 세상을 향해
- 아이들을 용서해야 아픈 세상이 낫습니다.
- 아이들을 사랑해야 봄은 오고 꽃은 핍니다.
사랑과 관용의 법전을 들고 전도하는 소년 판사
순정의 눈망울로 봄을 부르는 만사소년,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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