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휘몰던 어느 날 밤 그 어느 날 밤에
떨어진 꽃잎처럼 나는 태어났다네
내 눈에 보이던 아름다운 세상 잊을 수가 없어
가엾은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이탈리아 번안곡 '1943년 4월 3일생' 가사 일부)
1943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태어난 싱어 송 라이터 Lucio Dalla의 '4 Marzo 1943'는 1971년 산레모 가요제에서 3위로 입상한 칸초네로 우리나라에선 맹인가수 이용복이 '1943년 4월3일생'이라는 제목으로 번안해 부르면서 대중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검은 안경을 쓴 맹인가수 이용복이 "가엾은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라며 절규하며 노래 부르는 대목에선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노점상 모친은 연년생인 저를 떼려고 했습니다.
▲노점상 아버지와 연년생 형과 필자.
병으로 죽고, 물에 빠져 죽고, 전쟁 통에 죽고, 죽고 또 죽고…. 11남매 중 홀로 살아남은 순흥 안씨(順興 安氏), 충북 중원군 소태면 양촌리 출신으로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로 타관객지 생활에 지친 모친은 따뜻한 밥 한술 뜨고 싶어 '평안남도 대동군 용연면 천리'가 고향인 아바이 배천 조씨(白川 趙氏)와 혼례도 올리지 못하고 영등포 피난민촌(현재 영등포 신세계백화점) '하꼬방'(상자 같은 작은 집이란 뜻의 일본어로 판자촌을 지칭함)에서 살림을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알고 보나 열여섯 차이인 늙은 사내 배천 조씨는 고향에 처자식을 두고 온 북방 사내, 노점 단속반에 물건을 빼앗긴 날이면 술에 취해 울며불며 오마니를 부르는 눈물 많은 사내…. 피난민촌 중매쟁이에 속은 게 분해 그만 살려고 했는데 그만 첫아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방직공장 '경성방직'(현재 영등포 경방 타임스퀘어)에서 일하다 얻은 폐병과 천식 때문에 공장은 못가고 영등포 역전 노점에서 어린 자식 들쳐 업고 '오꼬시'(강정)와 강냉이 쪄서 팔며 생계를 잇는데, 38 따라지 배천 조씨와 사네 못 사네 지겹게도 싸우는데 두 번째 생명인 제가 모친 뱃속에 들어찬 것입니다.
금계랍(金鷄蠟 학질약) 수십 알을 먹고 독한 간장을 들이마시면 떼어낼 수 있다는 말에 머릿속이 맴맴 돌고 속이 뒤집히도록 먹었는데도 모진 생명이었던 저는 영등포 피난민촌 하꼬방에서 음력 1959년 12월 29일생으로 태어났습니다. 산파를 청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모친은 산고의 아픔을 이 악물어 버티면서 스스로 탯줄을 끊었다고 했습니다. 탯줄을 목에 걸고 태어났다고 해서 스님 될 팔자라던 저의 아명은 '태진'입니다. 불효자가 밑바닥에서 노래 부르니 "가엾은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1976년 영등포 시립병원에서 눈 감은 행려병자 배천 조씨는 벽제화장장에서 한 줌 재가 되어 북녘 고향으로 떠나고, 소년원 출신 '법자'(법무부의 자식들) 형은 순천교도소에 담장 안에서 살고, 패싸움 난투극에 무기정학 처분을 받고 공고 야간을 겨우 졸업한 이내 몸은 발브공장 납땜질 야근작업에 코피를 쏟다가 때려치우고 노가다로 공사판을 전전하다 느닷없이 문학 병이 들어 세상천지 방황하는 뱃놈이 되었다가 속세를 등지겠노라 입산했지만 반야심경도 외우지 못한 채 하산해 구로공단 프레스공이 되어 노동해방의 붉은 깃발을 들기도 했습니다만
사랑해서 결혼하긴 했는데 못 믿을 사랑이 깨지면서 버려진 어린 자식을 데리고 남부여대(男負女戴), 배천 조씨 아바이처럼 울며불며 헤매다 지하 예배당에서 눈물의 사내를 만났는데 그 사내 하시는 말씀이
"나도 너처럼 밑바닥 출신이다.
허름한 여관 말구유에서 태어나
밑바닥을 전전하며 살아온 인생,
너만 버림받은 게 아니라 나도 버림받았으므로
버림받은 인생들아 우리 거기 그 땅에서 만나자,
눈물로 밥을 말아 먹고, 한숨으로 춤을 추는 땅 갈릴리에서 만나자!"
는 호소에 이끌려 마흔여덟에 인생을 환승해 도착한 가리봉 차이나 타운은 밑바닥 인생들의 거리, "한국에 가면 떼돈 번다더라" 사채 써서 한국에 왔건만 산업재해, 임금체불, 알코올 중독, 노름 등으로 실패한 코리안드림! 타국 땅에서 눈 감은 이주민의 장례를 치르고, 병들어 쓰러진 인생들을 고향으로 보내주고, 악덕사업주와 싸우면서 6년의 세월을 보내다가 한 소년을 만났습니다.
2012년 오월, 성동구치소 접견실에서 만난 연쇄방화범 다문화 소년! 소련 공산당 간부의 딸이었던 어미에게 버림받은 모스크바 소년의 눈에서 소년원 출신 형을 봤습니다. 이 소년도 연년생 형처럼 소년원과 교도소를 드나드는 꽈배기 인생으로 살 텐데…. 소년의 딱한 처지를 보고 차마 외면할 수 없기도 하려니와 어미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의 눈물이 내가 흘렸던 눈물과도 같아서 가정해체로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의 갈릴리, 버림받은 슬픔 때문에 슬픔을 잉태한 미혼모의 갈릴리로 향했습니다.
부천역 뒷골목 으슥한 갈릴리,
원미동 반지하 단칸방 갈릴리,
동거하던 보육원 출신 사내는 달아나고
두 아이 혼자 키우는 보육원 출신 미혼모의 갈릴리,
어미는 어릴 적에 떠나고 알코올 중독
아비에게 맞으며 자란 떠돌이 소년의 갈릴리,
자살을 꿈꾸던 우울증 환자인 소년의 갈릴리,
미혼부의 아들로 태어나 할머니 손에서 자라
아비처럼 미혼부가 된 소년원 출신의 갈릴리,
그들의 눈물밥인 나사렛 사내가 당부하노니
"나의 가난한 형제들아! 어린 미혼모여! 고통과 신음의 땅 갈릴리에서 만나자. 그 땅 갈릴리는 팔레스타인 북부 지방만이 아니란다. 눈물로 밥을 짓고 한숨으로 생을 잇는 형제여! 누이여! 애통하는 자의 땅은 복이 있나니 그 땅이 위로를 받을 것이므로 눈물의 고개를 넘으며 울며불며 남부여대하는 나의 밑바닥 형제들아 우리 갈릴리에서 눈물 바람으로 만나자. 꼭, 만나자 우리!"
난민촌에서 태어나 판자촌에서 자란 밑바닥 출신이 무슨 문학을 한답시고 까불겠습니까. 글공부 좀 한답시고 먹물 행세를 하겠습니까. 밑바닥을 전전하다 가슴 속 울분과 눈물을 토해낸 것이 시라면 시겠습니다만 인생이 아름답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겠으며 밑바닥 인생이 무슨 수로 고결하고 순결한 시를 잉태할 수 있겠습니까. 설사 그런 시를 흉내 낸다 한들 그 시가 어찌하여 나의 삶이 될 수 있으며 어찌하여 문학이 삶보다 중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시를 써야 한다면 밑바닥 시를 쓰겠습니다. 그리 하기로 하고 이름 하야 '바닥_시편'으로 정했으니 눈물 나면 눈물 나는 대로 봄볕 따스하면 봄볕 시편을 띄울 작정이니 그대, '바닥_시편'을 받아보시려거든 밑바닥 인생들이 차린 눈물의 밥상에 둘러 앉아주시길, 가슴 속 어두운 곳에 쌓아둔 아픔의 알갱이들을 깨워주시길, 버림받은 아픔 때문에 그리운 사람을 미워하는 그대들이여 부디 상처 입은 서로를 긍휼히 안아주시길 부탁드리면서 첫 번째 '바닥_시편'을 띄우니 잘 받아주시길….
첫 번째 바닥_시편 , 무엇이 죄란 말입니까?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주일을 지키지 않는 죄가 아니고
십일조를 내지 않는 죄도 아니고
피눈물 흘리는 이웃을 보고도
눈 깜짝하지 않고 밥 잘 먹는
무정(無情)한 죄가 가장 큰 죄라고
눈 맑은 목사님이 말씀하셨다.
그 말에 무조건 아멘 했다.
(조호진 시인의 졸시 '아멘' 전문)
19년 전, 남도의 한 교회였습니다. 강단에 선 홍순관 목사님의 발음은 어눌했습니다. 알고 보니 홍 목사님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30여 년간 이민목회를 하고 은퇴한 뒤 귀국했기에 한국말이 서툴 수밖에 없었습니다. 1937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동족상잔의 6.25 전쟁 때문에 이남으로 피난 내려와 전라선 종착역 여수의 판자촌에서 유년기를 보낸 목사님은 숭실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공부한 뒤 장로회신학대학원과 미국 이스턴침례교신학교에서 종교교육학을 공부한 뒤 한국의 군부 독재정권에 맞서면서 재일교포 지문 반대 운동에도 참여했던 예수의 제자였습니다.
홍 목사님의 설교는 유창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습니다. 유리방황 (流離彷徨)하는 양을 돌봐야 할 목자가 딴따라도 광대도 아닌데 언변이 유창하고 겉치레가 화려하다면 필시 양의 탈을 쓰고 노략질하는 이리일 수 있으므로 그의 어눌한 발음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던 그는 주일성수를 지키지 않거나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을 죄 중에 큰 죄라고 겁박하는 한국 교회의 영업 방식에 탄식했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굴혈(窟穴)로 만든 한국 교회,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부잣집 담장처럼 굳게 잠긴 교회 문 앞에서 슬피우는 맨발의 사나이 나사렛 예수여….
말씀의 핵심은 이것이었습니다.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피눈물 흘리는 이웃을 보고도 눈 깜짝하지 않고 밥 잘 먹는 무정(無情)한 죄가 가장 큰 죄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피눈물 흘리는 이웃을 보고도 외면한단 말인가. 강도 당해 쓰러진 이웃을 보고도 어찌 지나친단 말인가. 목사님의 말씀에 저도 모르게 아멘 했습니다. 배천 조씨 아바이처럼 북녘 고향을 떠나 38 따라지 난민으로 유민으로 살아온 어눌한 목사님의 말씀은 시가 되었고 삶의 지침이 되었으며 우는 자와 함께 울라는 나사렛 예수의 말씀을 따르다가 못 따르기도 하며 밑바닥 갈릴리를 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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